평범한 중년 부부의 지긋지긋하게 평범한 삶, 그것에 어떤 비밀이 있을 수 있겠는가. 본 단편은 그런 평범하디 평범한 설정에 미묘한 서사를 부여한다.
때로는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있다. 나는 평범한 사람인가, 평범하다면 어떤 면에서 그러한가. 주인공인 중년 여자는 길가에 지나가다가 채일 정도로 많이 보이는 전형적인 아줌마이다. 더 이상 설명할 수도 없을 정도로 평범한.
그럼에도 그 안에는 남편을 향한 복잡하고도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다. 지극히 좀생이 같은 모습에 대한 혐오, 비밀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을 것 같은 지루한 사람에 대한 혐오. 하지만 결국은 그 사람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혐오.
종국에는 빈 화물차 안에서 남편에 대한 사랑을 깨닫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은 독특한 비밀을 갖고 있었다. 여자가 그토록 소망하는 뒤틀리고 기묘한 비밀을.
결국 평범한 사람은 없다는게 내 생각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 묘하게 뒤틀린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잠재해 있으며 때때로 현실로 드러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기묘한 불안감이 이 단편에서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열명의 병정 소년들” 을 오마주한 추리 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호텔 캘리포니아”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전체 맥락 상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아마도 극 상의 분위기를 만들고자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데 제시되는 장면에서만 일시적으로 소비되고 마는 듯한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제시된 소설, 노래를 제거하고 가상의 섬, 지역의 토속적인 분위기를 드러낼 수 있는 설화나 민담을 집어넣었다면 더 설득력이 있으며, 원작을 나름의 방식으로 비틀어냈다는 평을 받을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양귀비, 갯바위의 손 같은 소재들도 그 활용이 아쉽다.)
인물들의 설정도 약간은 이야기와 겉도는 느낌이 있고 일부 중심 인물을 제외하면 다른 설정으로 바꿔도 이질감이 없을 것 같았다.
마지막 장면은 피해입는 여성들의 이미지를 형상화 한 것으로 보이는데 전체적인 맥락과 약간의 거리감이 있었다. 소설가의 딸을 해친 오동수가 비 도덕적인 인물임은 분명하나 그가 많은 여성들을 해한 사람의 대명사로 불리기에는 극 상에 묘사된 것만으로 보아서 부족해보이기 때문이다.
물속의 입
책과 동일한 제목을 가진 단편 소설로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였다.
딸을 잃은 어머니와 딸의 남자친구의 대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어머니 혼자서 내면의 존재와 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속의 입은 딸이 어렸을 때 얼굴을 물에 담구는 독특한 방식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이 모습을 지칭하는 말로 보인다.
이는 그 자체가 물고문과 같이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연상 시키며 동시에 물 속에 있으므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 피해자로서의 여성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는 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면서도 딸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다. 이는 혈연으로 묶여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애증 또는 스스로를 딸과 동일시하여 고통당하는 여성 자신에 대한 자괴감, 자기 혐오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앞선 단편에서도 등장하는 호텔 캘리포니아가 여기도 등장한다. 호텔은 마치 어머니 자신을 집어삼킬것 처럼 수많은 문들을 열어 둘러싼다. 이는 여성으로서 벗어날 수 없는 피해자의 굴레 혹은 그 고통의 심연을 상징하는 것처럼 생각된다.